우리차와 다기들

한국과 일본의 다실

벽전(블로그) 2006. 3. 6. 21:57
[스크랩] 한국과 일본의 다실 | 우리차와 다기들
2006.03.05

한국과 일본의 다실





  

한국의 차실은 인간과 자연 하나되는 초한계적 개념의 공간




형식과 규칙을 좋아하고 전통을 계승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일본인과,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성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지형과 가옥구조와도 관계가 있으며, 또 일본처럼 다도를

제도화하고, 형상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양화의 여백을 사랑하듯 여백을 좋아하는 심성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의 차문화가 일본처럼 정형화된 행다 동작이나 뚜렷한 다도정신의 실천,

미의식을 발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여럿이 흔연히 마시는 풍류적 성격이 강한

차문화였기 때문에 차만을 위한 전용 차실을 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차실이라고 명명할 건축 양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을 뿐,

 차실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차문화가 주로 남성들의 문화였고, 남성들의 생활공간은 사랑채였다.

사랑채는 주거공간이며 접빈실이었고, 예술을 창작하는 작업실이었으며 차실이었다.

사랑채에 연결된 좀 높이 쌓인 돌출된 누마루도 차생활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수종사 삼정헌에서 내려다 본 두물머리  풍광)



조선시대 풍속화에 보면 사랑채 앞뜰에는 연당(蓮堂)이 있고, 몇몇 선비들이 사랑방에 모여

한쪽에서는 거문고를 타고, 한켠에서는 글을 쓰며, 또 두어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다.

마당에서는 한 동자가 찻물을 끓이는 풍로에 풀무질을 하고 있다.

앞문을 열면 계절 따라 피고지는 꽃나무 몇 그루와 소박한 석물(石物) 한 둘,

뒷문을 열면 반쯤 내린 발 사이로 바람에 서걱이는 눈시리도록 푸른 대나무가 얼비친다.

4면이 들문으로 되어있어 여름에 올려 걸면 4면이 모두 탁 트인 사랑채도 있다.

담양 소쇄원이나 강릉 선교장처럼 저택의 사랑채가 있는가 하면 다산초당처럼 고졸한 집도 있다.

 

 

 

 

(소쇄원 제월당 )

 

 

 

다산초당 앞에는 지금도 차를 끓이던 다조(茶 )가 남아 있다. 간소한 가재도구와 풍광

좋은 산세에 세워진 산사의 스님들의 방은 그대로가 차실이었다.

이런 가옥구조가 있었기에 차실을 따로 둘 필요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삼정헌 산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본 풍광 :  유담님 사진 )

 

 

또 집밖에 나오면 정자와 누각이 차실이 되었다.

정자와 누각은 4면이 트여있어 동서남북에서 각각 바라보는 경관이 다를 뿐 아니라,

계절따라 변하는 산야의 빛깔을 흠씬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계곡의 물소리, 여름 녹음 속에서 울어대는 뻐꾸기 울음, 가을 알밤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시는 시간을 무엇과 견줄 수 있을까.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정원문화가 없다고 하는 것도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연 실경보다 고압적이며 권위적인 중국 정원이나 나무 하나까지 전지를 해서

인공적으로 꾸민 일본 정원에 비하면 우리의 정원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민족이 정원을 꾸밀 예술적 안목이나 솜씨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형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우당 찻집의 내부 및 창밖의 풍경 )

 

 

집이 앉은 마을에는 뒤로 나즈막한 산이 있고, 멀리 첩첩한 산이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들녘이 펼처져 있다.

구태여 인공적으로 꾸밀 필요가 없었던 것은 주변의 풍광을 차경(借景)하였기 때문이다.

차경을 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들어가 더불어 산 것인지 모른다.

 

 평지에 가옥이 앉을 경우 많이 꾸며야 눈에 들어오지만, 우리나라 지형에서는 꾸미지 않아도

주변 경치가 배경이 되어 준다.

마당 한 쪽이나 뒷뜰에 배롱나무, 매화나무 같은 꽃나무 몇 그루,

괴석 한 둘만을 마치 어느 산모롱이나 늘 다니던 들길에서 만난 것처럼 옮겨 놓을 뿐이다.

최소한의 인공미만을 첨가시킬 뿐이다.

조물주와 인간의 합작이라고나 할까.

이런 자연 환경 속에서 생활한 사람들이, 정적이 흐르고 차의 맛과 그 정서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4면이 막힌 외부와 단절된 그런 차실에 적응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의 차실은 차생활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집안과 집밖의 경계를 나누지 않는 인간과 자연을 구분 짓지 않는 초한계적 개념의 공간이었다.

인간이 자연이며, 자연이 인간이라는 순리를 일찍이 깨달은 민족의 지혜인지 모른다.

 

( ㅇㅇㅇ님의 외가댁 다실  )

 


 조선 선비 차 즐겨
검소한 곳 다실 이용
초의선사 일로향실 유명

조선시대에는 승려뿐만아니라 선비들도 산림에 묻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차를 끓여 마셨다.

평양의 대동강변 만경루에는 차 화덕이 남아 있었으며 평남성 안주의 성안에 있는 벽상루에서도

차를 끓여 마신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차 마시던 집이나 다실은 대체로 검소했다.

문헌에 서거정을 배출한 유방선(1388∼1443)은 책을 보며 차를 마시는 방을 누추한 방이란 뜻의

누실이라 이름지어 새겼고 허균은 누실(陋室)이라 부른 서재를 겸한 다실을 누실명이란

시에 기록해놓았다.

다옥이란 신위가 자신의 오두막집을 다옥이라 부른 데서 연유된 말로 차마시는 집을 뜻하며

대개 띠나 억새,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이었다.

당시 다실의 이름으로는 추사가 쓴 죽로지실(竹爐之室)외에 초의선사가 만년에 거처했던

일로향실(一爐香室), 신위가 초의집의 서문을 써주었던 선원이름인

다반향초지실(茶半香初之室) 등이 있었다.

오늘날 일본 다실은 16세기 부터 독자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원류는 한국의 민가와 암자, 혹은 한국의 정자라는 것을

국내는 물론 일본의 학자들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김영배 ‘한국다도의 구조적 특징’중에서)

<태평양 건강사업부>

 

 

 

 

 

일본의 다실 (茶庭)

 

 

露地


노지(露地)는 손님을 다실로 안내하는 작은 길로

다회에 초대되어온 손님을 외부의 세계와 단절시키는

역활을 한다.

한번이라도 노지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밟고

지나간 돌이 황혼의 빛을 받아 촉촉하게 반짝이는 것이나

양옆으로 줄지어 선 뽀족한 잎사귀를 가진 소나무들,

푸르슴한 이끼를 이고선 화강암 석등이 주는 분위기를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노지(露地)를 지나며 왠지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난 듯한 감상에

싸인 손님들이 다실 앞까지 이르렀을 때 만약 그가 무사라면

반드시 옆구리에 차고 온 칼을 벗어서 처마 밑에 마련된

시렁에 걸어야 한다. 다실은 절대적인 평화의 공간인 까닭이다.

그 다음에는 허리를 굽히고 작은 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고 들어가는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이

다회에 초청된 손님의 의무이다

 

 

(일본 茶室의 내부 모습)

 

(일본 차실의 내부  찻물을 위해 불을 피우는 경우, 계절에 따라 붙박이,화덕,이동식풍로를

사용한다고 함)

 

 

다실은 소박하고 다구는 헌것이지만 다실 안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 으로 깨끗하다.

어두운 다실 한켠에라도 먼지 단 한톨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만약 단 한톨의 먼지라도 발견될 경우에 주인은 휼륭한 다인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정받고 만다.

다인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청소하는 법, 청결히하는 법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결과 청소 자체도 하나의 예술로 인정하고 철학을 심어 놓았다.

그들은 고대의 금속작품을 반질하게 닦는 법에 정통하면서 화병에 떨어진 물방울을

닦아내는 법은 없다. 물방울은 이슬을 닮았기 때문이다.

청소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어느날 센리큐가 양자이자 사위인 소암에게 집을 청소하고 정원사이로 난 길에

물을 뿌리라고 했다.

소암이 청소를 다 끝냈을 때 센리큐는 깨끗하지 않으니 청소를 다시 하라고 했다.

소암은 다시 한시간 동안 청소를 했다.

아버지 청소를 다 마쳤습니다.

돌 계단은 세번이나 닦았고 석등과 나무에도 골고루 물을 뿌려서 이끼에서

비취색 빛이 날 지경입니다. 나뭇가지, 이파리 하나도 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소암은 완벽하게 깨끗한 청소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센리큐는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빨강과 황금색의 나뭇잎이 가득 달린 나무가

들어찬 정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붙잡고 흔들어서 색색이 단풍이 바닥에 떨어지게 했다.

센리큐는 "가을의 정원은 나뭇잎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하고 나즈막히 아들에게 말했다.

 그는 완벽한 깨끗함이 아닌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이 조화된 상태를 원했던 것이다.

다실의 장식이나 다구의 색깔, 모양 그 어떤 것도 중복되어 서는 안된다는 규칙이

매우 엄격하다. 만약 꽃을 꽃아 놓았다면 화분을 들여놓아서는 안될 것이며,

둥근 다호를 준비했다면 물주전자는 각진것으로 마련해야 한다.

검은색의 천목다완은 검은색 차통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실내의 한가운데 위치한 감실에 향로나 꽃병을 놓을경우에도 그것이 감실의 정중앙을

차지해서 전체 공간을 반으로 나누지 않도록 한쪽으로 살짝 비켜선 곳에 둔다.

다실의 단순, 소박함과 탈속의 분위기는 그것을 외부세계가 주는 번뇌에서

"나"를 지켜주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암시를 준다.

16세기에 일본의 다실은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환영을 받았다.

노동자부터 용감하고 무서운 무사, 일본을 통일하고 통치하는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다실에서의 휴식을 좋아했다.

다도에는 이름난 사람도 무사도 평민도 그 어떤 계급의 구분도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형태가 일본의 다실(茶室)이다.